'과연 법과 정의는 어디까지 통치의 도구가 되어야 하는가?' '폭력을 통한 통치는 불가피한가?' 그리고 '국경이라는 경계 너머에서 인간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가?'
영화 '시카리오'를 통해 이 질문들을 던져보자.
미국과 멕시코 국경의 이중성
시카리오는 미국과 멕시코 국경이라는 독특한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다층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국경은 단순한 지리적 경계가 아니라 법과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곳, 법을 초월한 폭력이 펼쳐지는 공간이 된다. 멕시코의 국경 지역인 후아레즈는 가난과 폭력이 일상화된 무법지대처럼 묘사되며, 이는 단순히 미국의 시각으로 비춰지는 '혼돈의 영역'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국경은 미국과 멕시코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 그리고 미국이 자국 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멕시코 카르텔과 같은 조직의 폭력을 조장하고 이용하는 현실을 보여주는 일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입장에서 국경 너머의 혼돈은 두려움이자 통제의 대상이다. 영화는 바로 이 점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며, 미국 정부가 '보이지 않는 폭력'을 국경 너머에 방치하고 관리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국경선은 단순히 두 국가를 나누는 선이 아니라, 통치의 범위가 멈추고 폭력이 통치권을 대신하는 공간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통치성과 폭력의 정당화
영화 속 미국 정부는 멕시코 내의 마약 카르텔과의 전쟁을 단순히 범죄 퇴치가 아니라, 통치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 정부는 더 큰 혼란을 방지하고자 한다는 명목으로 비공식적인 폭력을 정당화한다. 마치 고대 로마가 팽창하는 과정에서 각 도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폭력을 공공연히 사용한 것처럼, 영화 속 미국 정부 역시 폭력을 질서의 일부로 여긴다.
미국 정부의 인물, 매트는 바로 이 정당화된 폭력을 수행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이 과정에서 타인의 목숨을 상실할 수 있는 도구로 여기며, '안정된 질서'라는 대의를 내세운다. 그의 방식은 국경을 넘어 불법적이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법의 범주가 아니라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폭력의 합리화다. 이는 미국이 추구하는 통치성이 한계를 넘어서며, 외부적 통치성(외부에 대해 힘을 발휘하는 통치)이 되어간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캐릭터를 통한 폭력과 복수의 심리 분석
영화 시카리오는 각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선택을 통해 폭력과 복수심의 심리를 다층적으로 탐구한다. 주인공 케이트(에밀리 블런트)는 FBI 요원으로, 처음에는 범죄 퇴치라는 대의와 법을 따르는 직업적 윤리를 가진 인물로 등장한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녀는 법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운영되는 미국의 방식에 점점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 케이트는 법의 원칙을 중시하는 인물로 설정되었지만, 작전에 투입된 이후 그녀가 믿는 정의는 무력해지고, 이로 인해 무력감과 혼란을 겪는다.
반면, 알레한드로(베니시오 델 토로)는 미국 정부에 의해 폭력의 도구로 사용되는 존재다. 알레한드로는 과거 마약 카르텔에 의해 가족을 잃은 개인적 비극을 가진 인물로, 법과 질서의 보호를 받지 못한 자의 처절한 복수심을 품고 있다. 그는 가족을 참혹하게 잃은 경험에서 오는 끔찍한 폭력성을 내면화하고 있으며, 그의 복수는 오히려 법과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영화는 이를 통해 복수심이 폭력으로 연결될 때 어떤 무자비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사적인 복수가 아니라 체제의 도구로 이용될 때 어떤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매트(조쉬 브롤린)는 이 복잡한 심리적 갈등을 조장하는 존재로서, 법이 아닌 '효율성'을 기준으로 작전을 진행하는 냉정한 인물이다. 그는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을 교체하려는 목표로 작전에 케이트와 알레한드로를 끌어들이며, 폭력과 복수를 정당화하는 위험한 논리를 펼친다. 이로써 영화는 매트를 통해 미국의 현실 정치가 폭력을 어떻게 정의하고 사용하는지를 드러낸다. 통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과 복수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개인에게는 치명적이지만, 그 자체로도 통제되지 않는 불안을 내포한다.
법의 경계에서 통치권의 모순
시카리오의 주요 장면들은 국경이라는 경계가 법과 통치가 미치는 범위를 결정짓는 공간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국경을 넘나들며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법은 단지 정치적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한다. 미국 정부는 멕시코 국경 너머에서 사실상 무법지대를 조성하며, 통치권을 확대하고 폭력을 행사한다. 이것은 주권 국가로서 멕시코의 통치권을 침해하는 행위지만, 미국은 이를 '질서 유지'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영화 속에서는 이 국경이 더 이상 국가의 경계가 아니라, 법과 폭력의 경계선이자 무정부 상태를 뜻하는 상징으로 기능한다.
영화는 이와 같은 통치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국경의 양쪽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보여준다. 미국과 멕시코 모두 폭력의 희생양이 되며, 특히 알레한드로의 복수극은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는 폭력의 진면목을 나타낸다. 폭력의 경계에서 통치권이 작동할 때 발생하는 불안정성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닌, 미국과 멕시코 전체의 문제로 확장된다.
폭력의 순환과 법의 공백: 영화가 던지는 궁극적 질문
영화 시카리오는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국경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법이 아닌 폭력이 통치의 수단이 될 때 일어나는 결과를 면밀히 탐구한다. 폭력이 법을 대체할 때 발생하는 문제는 국경을 넘어서고, 결국 양국 모두에게 치명적인 문제로 되돌아온다. 영화에서 미국이 멕시코의 무법지대에 개입하는 방식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하는데, 이는 단순한 법 집행이 아니라 폭력을 통치와 질서 유지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이로 인해 관객은 영화 속 인물들이 맞닥뜨리는 폭력의 순환을 목도하며, '폭력으로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근본적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특히 알레한드로가 벌이는 복수극은 멕시코와 미국 국경에서 일어나는 폭력의 순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개인적인 비극으로부터 촉발된 복수심을 통해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는데, 그 대상이 된 카르텔 두목 역시 가족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또 다른 '복수자'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결국, 폭력은 계속해서 되풀이되며,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 이러한 폭력의 순환은 알레한드로와 같은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정치적 목적과 통치의 도구로 악용되는 방식에서 더욱 확대된다.
케이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신이 미국 정부의 계획에 이용당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법과 정의의 본질에 의문을 던진다. 그러나 그녀가 끝내 이 모든 불법적이고 부도덕한 작전에 대해 항의할 수 없는 이유는 그녀 역시도 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현실 때문이다. 영화는 케이트의 이러한 갈등을 통해 '통치와 법의 경계에서 정의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법의 경계를 넘는 폭력과 통치성의 딜레마
시카리오는 단순한 범죄 스릴러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영화는 국경이라는 장소를 통해 법과 폭력, 통치와 복수의 복잡한 관계를 조명하며,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윤리적 딜레마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영화가 끝날 때 관객은 통쾌함이나 안정감을 느끼기보다는 불편하고 불안한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영화적 긴장감 때문만이 아니라, 법의 사각지대에서 폭력이 통치의 수단으로 작용하는 현실에 대한 문제 의식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시카리오는 결국 관객에게 묻는다. '과연 법과 정의는 어디까지 통치의 도구가 되어야 하는가?' '폭력을 통한 통치는 불가피한가?' 그리고 '국경이라는 경계 너머에서 인간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 세계의 폭력과 통치성, 그리고 법의 역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시카리오는 단순한 액션이나 범죄 영화가 아닌, 국경 너머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정치적, 윤리적 문제를 폭력과 복수라는 상징을 통해 서사적으로 풀어낸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법과 폭력의 경계에 대해 다시금 질문을 던지고, 통치가 언제나 법과 함께 움직이는 것은 아님을 암시한다.
'인문학 + 영화 + 음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하철도 999, 다시 볼까? (1) | 2024.10.31 |
---|---|
오블리비언이 던지는 관계에 대한 철학적 질문 (2) | 2024.10.30 |
조용필 20집이 들려주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 (3) | 2024.10.25 |
갓성비 화이트 와인 추천: 합리적인 선택 5종 (2) | 2024.10.23 |
['에이리언 : 로물루스'의 개봉을 앞두고] 명작은 시대를 반영한다. (1) | 2024.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