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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역사적 건축물 10가지

221b_bakerst 2024. 10. 21.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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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을 바라보는시선

명동은 한국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품고 있는 중요한 장소로, 그 속에는 다양한 문화와 시대의 흐름이 짙게 깃들어 있다. 건축과 미술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명동에 자리 잡은 건물들은 단순히 과거의 흔적에 그치지 않고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 그리고 국가의 정신을 담고 있는 유의미한 문화유산으로 보아야 한다. 건축은 그 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환경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매개체이기에, 명동에 서 있는 건물들은 각기 다른 시대의 이야기와 상징성을 품고 있다.

 

명동의 많은 건축물들은 20세기 초반에서 중반에 걸쳐 지어졌으며, 그 속에는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시절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당시에 지어진 건물들은 이제 낡고 오래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시대를 돌아보면 세계적으로 다양한 건축 양식들이 혼합되어 나타나던 시기였다. 서구에서 유행하던 고딕 양식, 르네상스 양식, 아르데코 양식 등이 한국의 도시 건축에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명동의 거리를 걷다 보면 서양의 건축 양식과 동양의 미학이 결합된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는 그 당시 한국의 역사적 맥락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한 편의 건축사라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건물들은 중국과의 연관성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1940-50년대에 지어진 이 건물은 대만의 상징인 태양 문양을 담고 있다. 이 문양은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가 강조한 철학과도 연결된다. 중국은 청나라의 몰락 이후 새로운 시대로 도약하며 ‘민족, 민주, 민생’이라는 원칙을 내세웠는데, 이 원칙이 명동에 서 있는 건물들에도 투영된 것이다. 우리나라가 중국을 공식 정부로 인정하기 전까지 대만 정부와 관련된 활동들이 여기에서 이뤄졌다가 현재 카페로 활용되고 있다.

국민당 한국지부, 1940~50년대 완공

 

명동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건축물 중 하나는 바로 명동예술극장이다. 이 극장은 일제강점기 당시 ‘명치좌’(명치 : 메이지, 메이지 천황.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인물. 왕정 복고 및 서구식근대화 추진 정책)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는데, 이 이름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식민지배자들이 한국에 극장을 세운 이유는 그들이 한국인들에게 자신들과 동일한 문화를 향유하게 함으로써, 식민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극장은 식민지배자들이 피지배자들과 동일한 문화를 소비함으로써, 그들 사이에 거리를 좁히고자 하는 상징적 장소가 된 것이다. 해방 후에는 이 극장이 국립극장으로 바뀌어, 한국의 중요한 예술적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명동예술극장, 1936년 완공

 

이처럼 명동을 걸으며 만나는 건물들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위한 건축물이 아니라, 그 안에 시대적 고민과 결단이 담긴 유산이다. 한국전력 서울본부 건물 또한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건물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재벌 저택을 본떠 지어졌으며, 일본이 근대 국가로서 유럽 열강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을 상징하고 있다. 당시 전기와 철도, 전신은 근대 국가의 상징이었기에, 전기를 관리하는 건물을 르네상스 스타일로 짓는 것은 일본이 스스로를 근대국가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이 건물의 하부는 거친 돌로 된 라스틱케이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상부는 공업적으로 생산된 벽돌과 유리창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건축적 요소들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양식을 적극적으로 차용한 것이다.

한국전력공사 사옥, 1928년 완공

 

명동의 건축물들을 살펴보면, 동서양의 문화적 혼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다. 건축 양식 자체는 서양의 것을 차용하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철학과 정치적 메시지는 동양적이며, 한국적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 바로크 양식을 따르고 있는 옛 광통관으로 사용되었던 이 건물은 1909년에 지어졌는데, 당시 유럽 열강들이 아시아 국가를 ‘야만적’이라 여겼던 시기에 한국은 스스로를 근대 국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서구의 건축 양식을 받아들이고, 그에 맞춰 건물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러한 건축물들은 당시 한국이 어떻게 유럽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예이다.

광통관, 가장 오래된 은행 점포. 1909년 완공 (현재 우리은행지점으로 사용)

 

명동을 걷다 보면 이 모든 건물들이 주는 의미는 그저 아름다움 그 이상의 것이다. 우리는 그 건축물들을 통해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고민과 결단을 느낄 수 있으며, 그들이 남긴 흔적들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단순히 낡은 건물이 아니라, 그 안에 역사의 한 페이지를 담고 있는 살아있는 유산인 것이다. 이러한 유산들은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게 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준다.

 

결국 명동의 건축물들은 단순한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건축과 미술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왔고, 그 과정에서 어떤 문화적 혼합이 이루어졌는지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이러한 건물들을 이해하고 보존하는 것은 단지 건축의 역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이해하고 미래를 위한 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명동의 역사적 건축물

1. 명동성당
 -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1886년, 천주교 신앙의 자유 허용 후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 토마스의 집이 있던 곳에 신축

 - 1898년에 준공된 한국 가톨릭의 상징적 건물
 - 한국식 연와조(벽돌 조적)로 지어진 네오 고딕 양식 건축물
 - 1977년 사적 제258호로 지정

 - 건축가 : 외젠 코스트 신부, 빅토르 루이 푸아넬 신부

 

 

2. 명동성당 사제관

  - 1890년에 완성, 명동성당보다 먼저 축조

  - 우리나라 최초 벽돌건축


3. 한국은행 본관
 - 1912년 건립된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 (조선은행 본점)
 - 현재 화폐박물관으로 사용 중

 - 건축가 : 다쓰노 긴고(辰野金吾, 1854 ~ 1919) (도쿄역, 일본은행, 구 부산역 설계) 

 - 구한말 중국인 차이나타운 형성 방해 목적으로 신설


4. 구 제일은행 본점
 - 1935년 건립된 근대 건축물 (조선 저축은행)
 - 현재 은행회관으로 사용 중


5. 신세계백화점 본점
 - 1930년 미쓰코시 백화점으로 시작
 - 한국 최초의 백화점 건물


6. 서울중앙우체국
 - 1915년 건립된 르네상스 양식 건축물

 - 1957년 전쟁시 파괴로 인해 철거 후 신축

  - 1981년 철거 후 지상13층 규모 오피스 건물로 재건축


7. 구 미국 문화원
 - 1938년 건립된 모더니즘 양식 건축물로 일본기업 미쓰이 물산의 경성지점으로 사용

 - 광복 후 미국대사관과 미국문화원으로 사용됐고 현재 서울시청 을지로 별관으로 사용 중


8. 명동예술회관
 - 1936년 명치좌 극장으로 건립된 근대 건축물
 - 과거 국립극장으로 사용


9. 남대문로 한국전력공사 사옥
 - 1928년 건립된 근대 건축물, 경성 전기 주식회사 사옥으로 사용

 - 건물 외관은 시카고파(Chicago School) 기능주의 건축양식에 르네상스 장식요소가 일부 접목
 - 현재 한국전력공사 사옥으로 활용


10. 구 동아일보 사옥
 - 1926년 건립된 근대 건축물
 - 현재 일민미술관으로 사용

 

 

정리하며

일제강점기 당시 르네상스 건축 양식이 많이 사용된 이유는 주로 정치적, 문화적, 그리고 상징적 목적 때문이다. 일본은 식민지에서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고 서양의 근대적 이미지를 내세우며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고, 이를 건축 양식에 반영했다. 르네상스 양식의 사용은 일본 제국의 문명화, 근대화, 그리고 서구와의 동등성을 표현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으며 여러 요인을 통해 이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서양 근대화의 상징으로서 르네상스 양식

르네상스 건축 양식은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유럽의 고전적 건축 부활을 대표하는 양식으로, 조화, 균형, 기하학적 형태를 중시한다. 이는 유럽 근대 문명의 출발점으로 여겨졌고, 서양에서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일본은 이러한 서양 문명을 표방함으로써 스스로를 근대 국가로 보여주고자 했으며, 르네상스 양식을 식민지 건축에 도입함으로써 이러한 이미지를 심어주고자 했다.

  • 서울역(구 남대문역)과 같은 주요 공공 건물은 르네상스 양식을 따랐는데, 이는 일본이 서양의 근대적 이미지를 모방하면서 자신들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2. 권력과 통제의 상징으로서 르네상스 양식

르네상스 건축 양식은 웅장하고 권위 있는 외관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제국주의 시대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고, 지배력을 상징적으로 과시하기에 적합한 건축적 요소였으며 일본은 조선 내에서 행정, 군사, 상업의 중심지에 르네상스 양식을 도입한 건축물을 세우며 자신의 지배력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려 했다.

  • 은행, 법원, 관공서와 같은 건물들은 이러한 양식을 채택해 일본 제국의 힘과 질서를 상징하는 역할을 했다. 대칭적인 디자인과 기하학적 구조는 질서와 통제를 상징하며, 이는 식민지 주민들에게 일본 제국의 권위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3. 서양 제국들과의 경쟁 의식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메이지 유신 이후 급격한 서구화와 근대화를 이루었고, 서양 열강과의 경쟁에서 자신들을 동등한 근대 제국으로 자리매김하려 했으며 서양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에서 사용하던 건축 양식을 모방함으로써, 자신들도 국제 사회에서 서구 열강과 대등한 존재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고자 했다.

  • 관동대지진 이후의 도쿄 재건과 같은 사례에서 일본은 서양식 건축 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조선에도 적용하여 서양 제국들과의 경쟁 속에서 자신들의 근대성을 과시하려 했다. 조선 내 르네상스 양식 건축물은 이러한 경쟁 의식의 일환으로 나타났다.

4. 문화적 우월성 과시

르네상스 양식은 문화적, 지적 발전을 상징하는 건축 양식으로,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문명화'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적합한 수단이었다. 일본은 자신들이 조선을 근대화하고 발전시키는 역할을 맡았다는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하며, 이를 표현하기 위해 서양의 근대적 건축 양식을 도입했다.

  • 조선총독부 청사와 같은 건물은 르네상스 양식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 건축물로, 일본이 조선을 문명화하고 있다는 식민 통치의 이데올로기를 건축물로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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