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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왜 아직 돌길을 쓰고 있을까?

221b_bakerst 2024. 10. 18.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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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도시들을 여행하다 보면 대부분의 도심 도로가 돌로 포장된 것을 볼 수 있다. 이 돌길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반들반들해지며, 유럽 특유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한층 더해준다.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 말, 그리고 마차가 지나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돌길은 그 자체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낭만적인 돌길은 여행자들에게 은근히 불편한 점들이 많다. 오래 걸으면 발바닥이 아프고, 무거운 여행 가방을 끌고 다니는 일은 쉽지 않다. 돌의 불규칙한 표면은 발을 헛디뎌 넘어질 위험도 높이며, 차량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도 불편을 초래한다. 승차감이 좋지 않고 타이어 마모가 빨리 일어나며, 도로 유지 관리 비용 역시 상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인들은 여전히 이 수백 년 전 돌길을 고집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이 오래된 돌길을 그렇게 지켜오게 한 것일까?

 

돌길의 기원
돌길의 기원은 고대 로마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는 처음 소금 장사로 시작한 작은 도시국가였으나, 상업이 발전하면서 소금을 실어나르기 위한 도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로마가 부유해지자, 기원전 4세기에는 군사적 필요성까지 더해져 주요 도로들을 확장하고 돌을 깔아 포장했다. 이때부터 만들어진 도로들이 바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의 유래가 된 로마 도로들이다. 로마 제국은 유럽 전역에 걸쳐 약 30만 킬로미터의 도로를 건설했으며, 이 도로는 상업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목적에도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이 도로망은 로마와 유럽의 주요 도시들을 연결했으며, 그 덕분에 파리, 런던, 빈, 쾰른 같은 도시들이 로마와의 교류 속에서 발전하게 되었다. 로마가 망한 후, 중세 시대로 접어들며 이 도로망은 한동안 쇠퇴했지만, 로마 도로의 유산은 여전히 그 뒤를 따르는 유럽 도시들의 도로 건설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중세
중세에 들어서며 유럽의 도로는 크게 퇴보했다. 장원 경제에 의존하던 이 시기, 각지의 봉건 영주들은 자신들의 영토 안에서 자급자족하는 경제 체제를 구축했다. 외부와의 교류가 거의 없었던 이들은 새로 도로를 건설할 이유가 없었고, 오히려 기존의 로마 도로마저 적의 침입에 이용될까 봐 파괴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렇게 도로가 사라지자, 유럽의 숲은 더욱 울창해졌고, 그 깊은 숲은 미지의 공포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헨젤과 그레텔, 로빈 후드 같은 이야기들이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11세기에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면서 숲 속에 길이 다시 뚫리기 시작했다. 이교도들이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봉건 영주들은 너도나도 전쟁에 나섰고, 군사들이 이동하려면 다시 도로가 필요해졌다.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끝났지만, 상업과 교류가 다시 활발해지며 도로의 필요성이 점차 커졌다.

 

르네상스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면서 도시와 도시를 잇는 도로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특히 마차가 주요 교통 수단으로 등장하면서, 이를 위해 포장된 평탄한 도로가 필수적이었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물동량이 급증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더욱 진보된 도로 포장 기술을 선보였다. 이 시기에는 많은 도시가 돌로 포장된 도로를 갖추기 시작했으며, 인구와 물류가 집중된 도심지일수록 도로 포장은 필수적이었다. 초기에는 자갈이 도로 포장용으로 가장 흔하게 사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자갈이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저렴한 소재였고, 무엇보다 말이 미끄러지지 않아 안전했다는 점이다. 자갈은 말이 끄는 마차의 견인력, 즉 마력을 높여주었고, 덕분에 당시 유럽의 도로는 주로 자갈로 포장되었다.

 

아스팔트 시대와 복원
그러나 19세기 중반, 아스팔트가 등장하면서 도로 포장의 풍경은 크게 변하게 된다.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 도입된 아스팔트는 승차감이 뛰어나고 속도를 높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유럽의 많은 도시들이 기존의 돌길을 걷어내고 아스팔트를 깔았지만,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다시 돌길을 복원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는 단순히 전통을 되찾으려는 감성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돌길의 실질적인 장점들이 다시금 주목받았기 때문이다.

복원의 이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돌길이 진동을 흡수해 오래된 건축물을 보호해준다는 점이다.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는 자동차의 속도와 함께 발생하는 진동을 고스란히 건물로 전달하는 반면, 돌길은 이런 진동을 흡수하거나 분산시켜준다. 이는 마치 철로에 자갈을 깔아 열차의 진동을 줄이는 것과 같은 원리다. 돌길은 자동차의 속도를 자연스럽게 억제하기 때문에 도심 속 고대 건축물들이 미세한 균열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돌길은 미적인 아름다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2차 세계대전 후,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들이 복구될 때 아스팔트를 깔았던 도시들은 반쪽짜리 복원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고풍스러운 건축물들과 대조적으로 깔린 아스팔트는 도시의 전통적인 매력을 크게 훼손했기 때문이다. 돌길은 그 자체로 예술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건축물들과 함께 그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표현하는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다. 최근에는 돌길의 패턴과 질감을 활용해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도시들이 늘고 있다.

세 번째 이유로는 보행자의 안전성을 들 수 있다. 돌길은 울퉁불퉁한 표면 덕분에 차량의 속도를 자연스럽게 줄인다. 이는 보행자의 안전을 보장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며, 돌길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은 보행자들에게 경각심을 준다. 또한, 돌길은 아스팔트보다 내구성이 뛰어나다. 깨진 돌은 그 부분만 교체하면 되니 유지보수도 간편하다. 돌은 자연 소재이기 때문에 환경에도 친화적이며, 배수 능력 역시 뛰어나다. 비가 내리면 아스팔트는 물이 고이는 반면, 돌길은 돌틈 사이로 물이 스며들어 배수 문제를 해결해 준다.

 

전통과 실용
이처럼 돌길은 그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도시들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은 아스팔트가 개발되자마자 대부분의 돌길을 걷어내고 아스팔트를 깔았지만, 유럽인들은 돌길의 전통과 실용성을 함께 고려해 그 가치를 지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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